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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미스테리 소설이 인기가 있는 일본은 그 쪽 계통으로는 소재도 장르도 다양하지만 충무로가 일본 소설의 판권을 구입해서 영화화한다고 할 때엔 걱정이 앞섰던 것은 항상 그랬듯이 정서 차이였다. 한국 관객들은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를 좋아하고 일본 관객들은 섬세한 심리 묘사와 일상성을 표현하거나 만화적 상상력의 실험을 보여준다. 이토록 극명한 기호 차이를, 관객의 성격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는데 <화차>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꽤 성공적이었다. 미야베의 원작 소설을 읽지는 못했지만 <악인>과 같은 스릴러 장르의 영화에서도 놓쳤던 장르 영화의 재미를 잘 살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몇 권 읽은 적이 있는데 <화차>는 한 때 <인생을 훔친 여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품절되었던 작품이었다. <모방범>은 살인의 대서사시를 보여주고 있는 방대한 작품이나 <화차>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장편 소설이라 영화화하는 데에 적절한 분량이었고 매번 사회적 의미를 보여주는 작품을 쓰는 미유키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어서 장르 영화의 매력만 잘 살리면 괜찮은 작품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지금까지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어떤 작품보다 한국 관객의 성향에 잘 맞게 각색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영화는 중반까지 과연 여주인공 경선이 선영의 어머니를 죽였는가, 또 경선이 선영이를 죽인 것인가 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변영주 감독은 헐리웃 감독 중 마치 캐서린 비글로같은 폭발력을 담고 있는 사람이다. 흔히 여성 감독들은 일상성, 여성성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변영주 감독 역시 <밀애>같은 작품을 통해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성 중심의 '성'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했지만 묘하게도 그가 보여주는 스타일은 무척 터프하고 강렬하다. 주변 인생에 대한 시선과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섬세함은 그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강한 에너지와 거친 듯한 미장센은 상반된 느낌을 주면서도 이질적인 것이 섞여 만들어내는 불안한 느낌을 준다. 덕분에 일본의 미스테리 소설이 지니고 있는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날이 선 듯한 분위기를 영화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세 배우의 호연, 특히 김민희라는 여배우가 보여준 가공할 만한 매력은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타인으로 살아가려고 했던, 이 악녀에 대해 관객들이 묘하게 동정심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데에는 김민희의 연기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가녀린 그녀의 외모와 한꺼풀 벗기면 또 다른 사람이 나올 것 같은 눈빛, 하지만 때로는 텅 비어 보이는 페이스는 지나치게 클로즈업을 많이 쓴 감독의 선택이 이해가 갈 정도로 오묘하다.

<화차>의 한 바퀴가 장르 영화로서 살인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착실하게 진행시킨다면 다른 한 바퀴는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바로 그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이 사회가 낳은 악녀를 진심으로 동정하게 된다. 어찌보면 '잡히지 말고 너로 살아'라고 하는 이선균의 대사는 관객들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살인 장면 만큼이나 충실하게, 공을 들여 연출된 듯한 여자와의 재회 장면은 보통의 스릴러에서 볼 수 없는 감정이 강렬하게 표현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임펙트는 왠만한 살인 장면보다 더 강하게 나를 끌어당겼고 이 영화를 본 지가 일주일이 넘었음에도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 역시 사회 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카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무 생각없이 소비를 하다가 연체라는 것을 해 본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땐 내가 소비를 절제하지 못하고 계획적으로 살지 못해 생긴 일이었으니 남탓은 못하지만ㅎㅎ 그 때 연체한 금액은 20만원 정도였는데 카드사가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전화를 해대는 게 정말 무서웠다. 처음으로 느꼈던 '빚쟁이'라는 압박감이었다고나 할까. 친구에게 돈을 꿔서 바로 갚아버려 독촉 전화를 안 받아도 됐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1주일 정도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이 영화가 진실로 무서운 이유는 그거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을 것 같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입장이 되면 어떤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을 죽게 한 이유가 더 무섭다. 이 영화가 피를 보여주지 않을 때에도 무서웠던 것은 그 때문인 듯하다. 혼자 대도시에 올라와 친구도 가족도 없이 일을 하고 누구로 대체된다고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고독한 여자들. 그리고 그런 여자의 인생을 훔쳐 살아가려고 하는 가련한 악녀. 아. 간만에 잊을 수 없는 악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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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lle79